시(詩)/이기철

이기철 - 밥상

누렁이 황소 2021. 1. 31. 17:33

 

산 자(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상 위에 놓이는 수저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겠는가

 

아침마다 사람들은 문 밖에서 깨어나

풀잎들에게 맡겨둔 햇볕을 되찾아 오지만

이미 초록이 마셔버린 오전의 햇살을 빼앗을 수 없어

아낙들은 끼니마다 도마 위에 풀뿌리를 자른다

 

청과(靑果) 시장에 쏟아진 여름이 다발로 묶여와

풋나물 무치는 주부들의 손에서 베어지는 여름

채근(採根)의 저 아름다운 살생(殺生)으로 사람들은 오늘도

저녁으로 걸어가고

푸른 시금치 몇 잎으로 싱싱해진 밤을

아이들 이름 불러 처마 아래 눕힌다

 

아무것도 탓하지 않고 전신(全身)을 내려놓은 빗방울처럼

주홍빛 가슴을 지닌 사람에게는 미완(未完)이 슬픔이 될 순 없다

 

산 자(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 솥에 물 끓는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 또 있겠는가

(그림 : 변응경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