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한혜영 - 아버지라는 극장

누렁이 황소 2020. 12. 12. 09:47

 

아버지는 역삼각형의 화면을 가진 영화관이네

희극과 비극을 차례로 상영하면서 나를

공략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지간히 지쳤지만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네

세상은 본래가 희극과 비극이라는

두 개 기둥으로 지어진 극장이라는 거

아버지 역시 두 개 기둥으로 지어진 극장이어서

다른 장르는 불가하다는 거

야외극장이기도 한 아버지는 꼭 밤에만 돌아오네

정사 신이라고는 없는

방아쇠 당기는 신이라고는 없는 영화는

번번이 흥행에 실패를 하고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할 수가 없는

아버지는 오늘도 나한테 표를 내미는 거네

덕분에 보고 또 보는 영화

아버지가 돌렸던

낡은 필름의 빗줄기를 이제는 이해할 수가 있네

차가운 빗줄기에 개 떨 듯이 떨며 보았던

그 어떤 슬픈 무비에도 나는 박수를 칠 수가 있네

상영관에 불이 켜지기 전

눈물 자국도 싹싹 지워야지

들키면 아버지에 대한 도리가 아니니까

(그림 : 김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