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김겨리 - 도떼기시장

누렁이 황소 2020. 12. 4. 11:35

 

어스름이 걷히면 드러나는 퍼즐 조각들,

듬성듬성 빠진 조각으로도 퍼즐은 완성되는 법이었다

묵은 책의 뒷장에 누군가 오래전 꾹꾹 눌러 써 놓은

그리움으로 발효된 한 줄의 비망록처럼

궤적이 고대로 고증되는 삶의 후기 같은 노점들

태생이나 혈통이 공증된 바코드도 없이

때 빼고 광낸 신상품 같은 이월품들이 좌판에 진열되어 있다

가격표 위에 다시 견출지로 몇 겹 덧붙여 쓴 숫자들이

생의 오차를 수시로 교정한 듯 글씨체가 흐릿한 건

우여곡절의 은유인 치열한 삶의 시행착오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흥정이 정가인데 굳이 붙여 놓은 이유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상처를 감추려는 예의여서였을까

맨땅에 아무런 표시가 없어도 그 오랜 세월

알아서들 각자 제 자리를 찾아 좌판을 펴는 삶의 영역,

간혹 결치(缺齒)처럼 빈자리가 생기면

두런두런 서로 안부를 묻는 바람에 흥정은 공치기 일쑤지만

서로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그 자리를 비어 두는 게 불문율이다

서로 알음알음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일가가 되어서

손님도 상인도 모두 촌수가 생겨 버린 한통속들

두부 한 모에 덤으로 끼워 주는 도토리묵 반 모가 미안스러워

콩나물 한 봉다리 더 사게 만드는 저 수완

전대는 가벼워도 다정의 빚덩이만은 묵직하다

추억으로 의역하려고 해도 자꾸 견딤으로 직역되는 장터,

꽃말로 치면

통째로 고분이 되어가는 삶의 이데올로기

(그림 : 김의창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