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박은형 - 그 나무 붉은 지문 밑

누렁이 황소 2020. 11. 16. 16:25

 

그럼에도 그 꽃나무 아래서 만나자 했다
그러니까 더욱 그 꽃나무 아래로 찾아오라 했다

 

새 옷 입는 꿈을 꾸었다는 당신은
차디찬 이월의 매화에 눈썹을 그려 넣자 했다
달콤한 맹세 같은 향기에 부빈 눈과 귀 멀어 보자 했다

 

나무는 방금 잊히어서 죽었다 울었다 하는 구원과
첫 꽃 구사하는 물색없는 사랑들에 둘러싸여 있다

 

삼백 년을 저렇듯 기다려서
한 가지 말과 일색의 마음인 꽃잎을 짓는 중이다
제발 만지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헛된 다짐으로라도 지켜 주고 싶게 하는 것이다

 

붙들 수 없는 꽃잎경을 알아듣게 고쳐 건네는
그 나무 붉은 지문 밑
우리는 그렇게 잠시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림 : 강정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