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변종태 - 목련 봉오리로 쓰다

누렁이 황소 2020. 11. 14. 22:18

 

1.
봄 안개 자욱한 남도에 목필화(木筆花) 피어납니다.
봄기운 듬뿍 받은 봉오리, 안개를 담뿍 찍어
당신들의 이름을 씁니다. 봄이 오는 이 땅,
한라산정(漢拏山頂)에서 탑동 바다까지
써도 써도 다 쓰지 못할 그대들의 이름,
봄이 오는 이 땅 구석구석에 쓰고 쓰고 또 씁니다.
당신들이 걸었던 산과 들과 바닷가
당신들이 울었던 곰솔 아래, 당신들이 속삭이던 돌담 아래
당신들이 숨죽였던 깊은 어둠에
당신들의 간곡한 이름을 새겨 넣습니다.
안개 입자만큼이나 많고 많은 당신들의 이름,
이 땅을 일구신 당신들의 이름,
역사는 기억도 못하는 당신들의 이름을.


2.
오늘, 마당 가득 지등(紙燈)을 켭니다.
목필화(木筆花 )봉오리 화르라니 피어나
짙은 어둠 속 백등(白燈)으로 흔들립니다.
바람이 분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었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 것이라고 합니다.
사월만 되면 불어대던 광풍(狂風),
수상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봉오리를 쥐고 흔들던, 그날의 바람, 목덜미를 스칩니다.
하지만 오늘, 다시 바람이 붑니다.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당신들의 이름을 어루만지는 바람,
붓을 쥔 손이 떨립니다.
안개 가득한 들판에 투명한 글씨로 안부를 묻습니다.
오늘도 안녕하냐고 묻지는 않겠습니다.


3.
제주 안개는 상처를 감싸 주는 붕대,
안개 아래로 새살 돋는 사월, 당신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당신들의 손길로 어루만지신 이 땅, 제주의 하늘에
흐르는 안개 사이로, 당신들의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바람 따라오신 그 걸음으로 이 땅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이 땅의 내일을 밝히시는 당신들의 이름,
사월이면 제주에 목련이 피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마당에 피어나는 목련 꽃송이가
그렇게 망설이며 피어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육십여 년 전 광풍(狂風)에 허망하게 떨어지던 목련 꽃잎,
상처 입은 목련 꽃잎들이 질펀히 드러누운 그 위로
다시 초록빛 바람이 부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행여나 누가 볼까 소리 없이 떨어지던 목련 꽃잎,
그 순백 뒤 진한 초록을 머금고 있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밤이면 조용히 흔들리며 피어나는 당신들의 이름인 걸,
꽃잎 한 장씩 열릴 때마다 아물어가는 제주의 아픔인 걸
이제야 알겠습니다.

목필화(木筆花) : 목련(木蓮)꽃의 다른 이름.

(그림 : 한부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