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이희은 - 뒤로 걷기

누렁이 황소 2020. 10. 19. 17:03

 

이대로 걸으면

어제의 자정에 도착할까

빠진 발톱 끼워져 있을까

 

시계의 트랙이 꿈틀거린다

헐거워진 숫자들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중심 잡으려 애쓰지 마

흔들림에 맡겨도 돼

 

시간이 거꾸로 데려다준 곳

동굴 같은 어느 한 지점, 점자 읽듯 더듬어

어제도 오늘도 아닌 곳 쓰다듬다 보면

 

발가락에 가시처럼 박힌 기억들

발톱이 빠진 이유

첫눈 위 발자국처럼 떠오르고

 

나의 몸은 축축해져

기어이 울음이 쏟아져

세찬 물결 소용돌이치고

 

몇 번의 폭우가 끝나면

물결은 스스로 강을 찾아 흐른다

 

조용히 가시를 빼고

발톱 찾아 끼우고

 

심장에 새로운 초침 소리 심으며

싱싱해진 새벽을 걸어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새살 돋을 때까지

 

이대로 또 걸으면

어느 자정에 도착할까

(그림 : 이석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