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최영랑 - 분장법
누렁이 황소
2020. 9. 26. 17:03
타인의 세계를 수식하는 것, 변신은 그렇게 은폐로부터 시작된다
누군가의 얼굴을 잠깐 빌리자 빙 둘러치고 있던 울타리가 사라진다 무대가 넓어진다 가면 속
그는 환상통을 앓고 있는 자신의 체취를 밀어낸다 매번 자신을 버릴 기회를 놓치고서야 많은
민낯이 그를 붙들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익숙한 얼굴이 낯선 시간 속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한통속
이 된다 그는 매일 낯선 곳으로 출근한다 그가 불쑥 그를 열고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해독이 쉽
지 않은 세계, 그는 여러 개의 얼굴을 수시로 갈아 끼운다 오늘은 어떤 얼굴이 맘에 듭니까? 질
문의 발신자는 있는데 수신자는 없다
그는 매일 밤 분리된다 무대는 매일 새로워져야 하니까 자아와 자아 사이 비굴하게 웃는 가면
을 마지막인 양 끼워 넣는다
사람들은 그를 카멜레온이라 부른다 그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타인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던 걸
까 고여 드는 것들은 어디엔가 침잔한다 아무리 비누칠을 하고 아무리 빡빡 문질러도 민낯이 돌
아오지 않는 날이 있다
아무도 모르는 최초의 가면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림 : 신재은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