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최명란 - 폐차를 하며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누렁이 황소
2020. 8. 26. 17:35
이십 년 넘게 몰던 차를 폐차한다
그를 폐차장에 버리고 돌어서자 비가 내린다
한 음 내리지 않으면 부를 수 없는 노래처럼
끼익끼익 있는 대로 음을 높여 소리 지르기도 하고
가래 걸린 목구멍처럼 꺼억꺼억 숨이 차오르기도 하는 그를
그래도 사랑하는 일은 폐차장에 버리고 돌아서는 일이다
물론 그는 내게 올 때부터 중고였으므로 굳이
가책의 눈물 따위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걸핏하면 시동을 꺼뜨리는 횡포를 일삼았고
잘 나가다가도 길 한가운데서 넙죽 퍼져버리기 예사여서
정비공장 뿌연 불빛 아래 선 채로 밤을 새우게 했던 그였으므로
굳이 그와 함께 평생 고속도로를 달릴 수는 없다
비를 맞으며 위반한
속도위반 신호위반 주차위반으로 밀린 과태료가 백만 원이다
사회의 동의 없이 숨어서 지은 내 죄값이 고작 백만 원이라니
이십 년 저지른 그 많은 위반의 죄값치고는 제법 싸다
폐차장에 그를 버리고 비를 맞으며 돌아서는 길
납작하게 눌린 쥐포처럼 한 장 뼈만 남기고 간 그에게서 비로소
냉담히 맞서다가 뜨겁게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그림 : 이운갑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