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규리

이규리 - 모래시계

누렁이 황소 2020. 8. 22. 15:23

 

뒤집어지지 않으면 나는 그를 읽을 수 없어

뒤집어지지 않으면 노을은 수평선을 그을 수 없어

그리고 무덤은 이름들을 몰라

 

폭우가 유리지붕을 딛고 지나가면

장면들은 뒤집어지지

편견은 다시 뒤집어지지

 

간곡히 전심으로, 이런 건 더욱더 뒤집어지지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밤이 많았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걸 열 번 더 해도

그냥 문을 열 수는 없었지

혁명은 문이 아니었지

 

설명을 길게 하고 온 날은 몸이 아팠다

 

애인들은 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사하지 않아야 한다

 

뒤집어진 이후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두기로 한다

 

때가 되기도 전에 누군가는 성급히 몸을 뒤집었고

또 누군가는 습관처럼 그걸 다시 뒤집고

이후는 늘 무심하니까

모래가 입을 채우고 나면

조금은 다른 걸 생각할지 모르니까

제 위치를 몰라

우리는 슬프게도 늘 뒤집어지는 중이니까

(그림 : 조선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