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김지민 - 벼룩시장

누렁이 황소 2020. 8. 15. 16:41

 

벼룩시장에 왔는데, 벼룩시장은 벼룩 같은 것들을, 나를 좀먹는 것들을 팔러 나오는 곳으로 알고, J의 물건과 같은 것

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는데

 

사람들이 멋진 걸 판다 진짜 상인처럼 빛나는 것들을, 벼룩시장이 아니라 시장에 있을 법한 것들을 늘어놓고

 

여기 오세요, 이것 좀 보세요, 내일은 없어요, 일어나 소리치는 것이다 벼룩시장은 벼룩 같은 것들을 쌓아두고, 벼룩처

럼 앉아 시간이나 좀먹는 곳으로 알고 왔는데

 

옆자리 여자는 직접 만든 라탄 바구니를 앞에 쌓아두고, 실시간으로 바쁘게 손 움직이며 라탄 바구니를 늘리고 있다

완성하면 앞에 툭 쌓고, 툭 쌓고, 툭툭 쌓고, 그렇게 오전을 흘려보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이며 기념으로 사 온 싸구려 공예품이며 J의 냄새가 남아 있는 물건들을 쌓아두고, 나를

그 사이에 파묻어두고 하릴없이 앉아 있는데, 실은 팔리고 싶은 것처럼 숨죽이며 발가락 꼼질거리고 있는데

 

내 앞으로 사람들이 휙휙 지나간다 부채질하며 깔깔거리며 나의 해묵은 물건들을 따돌리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다들

거대해서 그늘져 보이는데,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 시간이나 좀먹고 있다 누군가 나를 이곳에 벌여놓고 식사하러 간 것

처럼

 

팔리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발목 하나가 우뚝 멈춰 선다 J의 스웨터를 집으며 이거 얼마예

요? 묻는다 옆자리 여자도 손을 멈추고 나를 본다

 

나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른다 그가 J의 스웨터를 툭 놓고 사라진다 J의 스웨터가 내게 툭 돌아온다 옆자리 여자도

다시 손을 움직인다 발목들도 다시 지나간다

 

벼룩시장은 점점 더 활기를 띠고 날은 어두워지고 옆자리 여자는 라탄 바구니와 함께 쌓여 있다 나는 팔 생각도 없이

팔러 나와 팔리지 않는 물건들과 실은 팔리고 싶은 얼굴로 앉아 있다 열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무슨 생각 같은 것을 하고 있다

(그림 : 김의창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