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홍순화 - 농부의 책
누렁이 황소
2020. 7. 30. 15:59
뻐꾸기가 울었다
긴 휴식에서 깨어난 늙은 농부가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글씨들을 들고 들로 나간다
수정이 불가능한 글쓰기라
결코 서두르지 않고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 넣는다
감자심기로 시작하여 마늘심기로 끝이 나는 농부의 책
자신의 주름을 모방한 밭고랑에
혹시나 오자(誤字)나 탈자(脫字)가 생길까봐
호미를 들고 김매기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고라니, 멧돼지. 노루에게 뜯어 먹혀
파본(破本)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울타리도 친다
친환경농법을 고집하는 그의 책에선
향긋한 거름냄새가 코를 찔렀다
몇 번의 퇴고를 거듭한 끝에 만들어진 그의 책은
늘, 단편 뿐이지만
일 년을 꾹 참고 읽어야만 내용을 알 수 있다
겨울이면 유난히 책을 좋아하는 흰눈이
게걸스럽게 농부의 책을 먹어치울 것이다, 그러면
마술처럼 책의 흔적들은 하얗게 사라질 것이다
처마에 매달린 글씨들 겨울바람의 앙탈에도 끄떡없이
내년에 펴낼 책들을 디자인하고 있다
(그림 : 신재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