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손미 - 국수

누렁이 황소 2020. 7. 23. 17:33

 

역에 도착하면 밟고 온 길을 끓이자

실 하나 잡고 따라나선 날처럼

 

당신이 구부리고 앉아 면발을 빨 때

긴 가닥이 유일하게

당신 속을 읽을 때

 

혼자 걷던 길들이 찬장에 쌓여

이상하게 명이 길어질 때

 

앞으로, 뒤로, 같은 길을 오가며

젓가락에 매달린 국수처럼 살고 있을 때

 

당신이 목구멍 같은 터널에 여러 번 먹히면서

둥근 그릇을 돌고 있다면

 

밟고 온 길들을 솥에 구겨 넣고 우르르 끓이자 누구도 못 쫓아오게 두 손을 모으고 들어가자

늦은 밤 등을 구부리고 식탁에 앉았을 때

 

여기가 어디지?

당신이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릴 때

 

국숫집을 지나 국숫집을 지나 또 국숫집을 지나

도착하지 않을 때

자주 흔들릴 때

 

국수를 빨면 면발이 끊어지고, 폭우가 쏟아져 이렇게 많은 길이 깨질 때

 

빨아도 빨아도

허기가 질 때

(그림 : 허영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