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감태준 - 역에서 역으로

누렁이 황소 2020. 7. 10. 17:12

 

공원 벤치는 자고 나는 간다.

레일을 따라 아득한 세월 속으로

투덜대는 바퀴를 달래며

긴 짐칸을 끌고

간다.

 

잘 있거라, 거리여

심심한 가로등 불빛이여

남은 불빛 창 꺼트리며

막막히 서 있는 빌딩들이여,

 

축복하자, 구불구불한 레일에

구불구불 따라오는 저 바퀴자국을,

달아나는 택시에게 삿대질하는 저 취객을,

이 밤에 가야할 길 붙잡고 포옹하는

저 뜨거운 연인을,

 

나는 보면서 잊어버리고 간다.

잊으려고 해도 잊어지지 않는

까만 눈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잊으려고 해도 악착같이 옆에 와서 팔짱 끼는

내일을 끼고

 

가다가

어제 쉬어 갔던 커피 집

불 꺼진 간판 보고 싱겁게 웃는다,

여주인 시계 차고 달아난 아가씨를 생각하고.

 

웃지 않으면?

구불거리지 않으면?

 

나는 레일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짐칸에 실은 궤짝 단단히 묶고

욕망의 키만큼 긴 그림자를 끌고 간다,

집으로 아득한 세월 속으로

(그림 : 김태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