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지정애 - 강가 카페

누렁이 황소 2020. 5. 25. 19:50

 

여기까지 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격했던 시간들 내 몸에서 서서히 빠져나가고

짓물렀던 슬픔도 엷어진 이제

내 품으로 돌아온 생이

몇 백년 된 나무를 껴안고 숨을 고르는 동안

케냐의 뜨거운 태양이 녹아 있는 커피를 마신다

 

햇살의 비늘을 쪼며 줄지어 가는 오리들

마음 한켠의 그늘은 물 위로 흘러가고

빈 숲속의 고요가 부르는 소리 들린다

끊어졌던 길로 다시 돌아가면

부르다 만 노래는 아직 따스하고

햇살 한 자락 내려앉은 꽃의 이마는 눈부시다

 

모든 상념들은 잦아들고

나는 먼 하늘빛에 물들어간다

내일, 풀빛 아침의 등에 업힌 햇살과

나를 지나쳤던 별들이 찾아와

검은 커튼 쳐진 추억의 집을 밝혀주리

(그림 : 강철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