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대흠

이대흠 - 다정에 감염되다

누렁이 황소 2020. 4. 24. 18:40

 

다정에게는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병아리 털처럼 순하고 병아리 눈동자처럼 동그랗습니다

다정은 손을 내밀고 다정을 담은 그릇에는 모서리가 없습니다

다정에는 가시가 많습니다만 너무 많은 가시에서는 가시를 느낄 수 없습니다

언뜻 본 다정은 안경닦이 같습니다

어떤 다정은 너무 커서 다정의 날카로운 발톱이 흙 언덕으로 보입니다

여력이 있다면 한 평의 땅을 사는 것보다는 다정을 구입하는 게 낫습니다

다정은 소모되지 않고 늘일 수 있으니까요

주의 사항은 있습니다 유통기한은 없습니다만 쉽게 흘릴 수 있습니다

다정을 과자 봉지에 넣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면 놀라울 것입니다

한 봉지의 다정을 담아 건네면서 달의 이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다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중독은 아니고요 감염된 건 분명합니다

내게는 갓 낳은 달걀 같은 다정이 또 생겼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병의 씨앗입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다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의 다정이 싹틀 때가 오면 풀잎들처럼 나란히 앉아 봄을 낭비합시다

(그림 : 홍문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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