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곽효환 - 선암사에서

누렁이 황소 2020. 4. 24. 10:08

 

 

길고 깊었던 겨울의 끝이 아련하거든

꽁 얼었던 개울도 조금씩 녹아

붉은 낙엽 실은 눈석임물 흐르거든
남도 선암사에 가셔야 합니다
자욱한 안개 갈대밭도 순천만도 다 삼킬 듯한
겨울도 봄도 아닌 그 사이 어느 날
마른기침을 토해내는 오래된 산사
무심히 무리 지어 있는 편백나무숲
그 고요 그 침묵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지난가을 끝자락 금목서 향기 다 잊히기 전에
무우전 담벼락에 고매화 나른하게 피기 전에
조계산 굴목재에 연초록 오르기 전에
젖은 나무연기 잦아드는 저물녘
고즈넉한 침묵을 그 쓸쓸함을
밟으시려거든 이곳에 오셔야 합니다
천년 절집의 들머리에서부터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그렁그렁한 숨소리, 말간 민얼굴
당신 닮은 계절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다시 나의 봄이 됩니다
(그림 : 김영옥 화백)
 

Bandari - Temple of Pea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