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성영희 - 호미를 걸며

누렁이 황소 2020. 3. 16. 14:22

 

뿌리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욕심도 부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꼭 한 줌씩만 심거나 뽑겠다는

흙에 대한 예의다

어느 연장이든 손잡이가 있다는 것은

맨손의 불경을 허락치 않겠다는 뜻이다

끝이 뭉툭해질수록

얇아지는 호미 날을 보면

흙도 찌르면 아프다는 것을 알아서

제 살을 조금씩 내어주는 것 같다

처음엔 검은 쇠의 빛깔이

구름을 헤집고 나온

하늘 한편같이 맑고 파릇해지는 것은

무수히 갈고 고른 흙 덕분이다

파낼수록 부드러워지는 흙처럼

둥글어진 호미 끝에

씨앗과 잡초들과 비오는 날의 모종까지

안쪽으로 끌어모아야 사는 것들의

한 생이 붙어 있다

 

가을 헛간에 일별로 걸린

봄 들판의 연장들처럼

투박하고 무딘 등이 겨울을 나는 동안

헐렁한 마디에선 움이 틀 것이다

그건, 맹목적 믿음이다

(그림 : 장용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