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조정인 - 꽃나무와 남자

누렁이 황소 2020. 3. 11. 18:14

 


별들 옛주소를 들고 문전을 기웃대던

늙은 겨울이

맨 처음 마주친 어린 봄의 혀 위에

이는 내 몸! 하고 연둣빛을 올려놓네

 

검정 외투 밑에 숨겨온 가려움증도 옮겨가

가지에 화농처럼 골똘한

꽃눈

 

흰 빛에 분홍 그늘이 물든 꽃의 미열이 엿보이네

느리게 뒤척이는 꽃가지, 나무 안에 점차 종소리 번지네

 

먼발치 나무는

한 길도 넘는 제 외로움에 발을 담그고

하늘로 목을 치어드네

 

나무 아래는 빛과 그늘이 기워놓은 걸인 하나

꽃그늘로 온통 화상을 입은 얼굴

발 아래 흥건한 그늘이 수런대기 시작하네

그의 낮잠 속으로 기린처럼 꽃가지 뻗어가네

벌어진 입 그득히 물린

무성한 꽃가지는 무성한 뿌리의 환영(幻影)

 

대림절(待臨節), 나무는 훅 불어 끈 양초처럼 적막하네

공원을 찾은 겨울이

벤치에 앉아 지난 환영의 날들을 읽다 일어서네

(그림 : 정희승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