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구광렬 - 주전자에 물을 끓이다
누렁이 황소
2020. 3. 4. 10:12
가을 저녁, 차를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새어나오는 김, 얼음만큼이나 다른
물의 또 다른 모습:
나도 끓으면 저렇게 가벼워지려나
그래 한 때 나 끓은 적 있다
비틀즈와 존 덴버를 흥얼대며
지하철 1호선을 오르던 시절,
광화문 뒷골목을
오색낙엽이 막걸리에 젖던 캠퍼스로 여기며
담배 연기 대신
최루탄가스를 폐 깊숙이 찔러 넣고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를
교가처럼 부르던 시절:
하지만 난 뜨거웠으나 가볍지 못했다
난생 처음 여인의 입술을 통해
내 이름 석 자 불려 지던 날에도
낙뢰가 피뢰침에 떨어지듯
첫 여인의 터치가 우산대를 타고
내 맨손을 전율시키던 날에도...
난 그냥 얼음이었다 뜨거운 얼음
다시 끓으면 가벼워지려나...
눈 감고 끝내 못 부친 그 때 그 편지를 생각하며
늦은 이 가을, 마냥 주전자에 물을 붓는다
(그림 : 강수남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