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한영옥 - 우둔

누렁이 황소 2020. 1. 16. 17:24

 

망설임 끝에 겨우 접은 망설임이었는데

함께 발맞추며 걸어가던 길 툭 끊어들더니

슬며시 동반(同伴)들 저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방향을 튼 뒤 재빠르게 멀어져간다

망설임 끝에 어렵사리 펼친 의욕이었는데

가파르게 멀어져 뒤따르기 어려웠다

저쪽은 무성해질 것이다, 화사해질 것이다

버려진 것이라면 분명 까닭이 있겠는데

미처 깨달아내지 못한 뭣이 뾰족하겠는데

황망하게 사방을 둘러봐도 등 비빌 데 없었고

봄이 오면 이곳도 꽃물결 찰랑댈 거라는 짐작뿐

겨우 그뿐, 우둔하게 땅만 보며 짐작이 가난했으니

매끈한 대열에 끼어든 것 애초에 무리였으리

끊어진 자리에 못박혀서 저쪽 굽어보는 갸웃한 모가지

혼자만 모르는 그 뭣이 분명 있었던 게지, 있었던 게야

한 해 두 해 답답하다 오백 년 다 돼가는 느티나무

그냥 그 자리에서 꽃 짐작만 거듭 환해질 뿐

헤헤거리며 앞지르기 잘했던 전생(前生)은 깜깜할 뿐.

(그림 : 이주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