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고형렬 - 내가 사는 먼 곳 지상전철이 지나갈 때

누렁이 황소 2020. 1. 6. 10:09

 

모든 것을 중지하고

 

자서전을 쓰듯 멀리 지상 전철이 지나가는

레일 소리가 절실하다

 

그 소리는 내 뼈의 영혼 속으로 침잠한다

 

먼 아침마다 문산에서 이슬을 털며 떠나온 전철

감기 마스크와 이국 여자와

학생 몇을 태우고

떠나올 때 마음은 물론 변함없지만

 

열차도 돌아갈 수 없는 한때를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 열차는

양평에서 중앙경의선이 되어

저 삼십대의 저녁 문산으로 돌아간다

 

좋아라 차분한 발진 시작하면 야산의 능선도 따라

울릴 때도 있었다

모두 우울하고 슬픈 날만 있지 않았던

중앙선과 경의선의 연결

 

오늘 그 하나의 짐이

실내에 환한 등을 달고 가는 나의 밤 열한 시 반

이마에 라이트를 켜고

마지막 오늘의 수도를 관통해온

여덟 량의 은색 박스 속에

 

나의 꿈은 벌써 길도 없이 카시오페이아 하늘에

닿고 말았다 그때, 닿지 말 것을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그림만 그리고 있었나

그 어떤 시간만

나에겐 과거도 미래도 오늘도 아니다

 

나라고 하는 어느 당자(當者)는 일요일 오늘

그 오전

그해 나뭇가지를 손질하다가 그 레일 소리를

그만 심장 속으로 흘려보내고 말 것이다

(그림 : 임재훈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