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윤일균 - 청미천에서

누렁이 황소 2019. 11. 20. 21:26


예서 속 깊은 가을의 소리를 듣는다
개개비도 떠난 들녘
오랜 벗 같은 사람 하나
기울어진 농가 앞을 저물도록 서성거린다
고봉밥 먹여주던 큰 들 지나서
일백육십 리 물길 아프게 굽이쳐 흘러 남한강에 이르도록
네가 키운 건 돌붕어 모래무지 메기만이 아니다,
말하자면 청춘의 재 너머
기약 없이 흔들리는 시대의 물빛으로 너는
금모래 언덕 남한강 갈대들을
품마다 온종일 끌어안고서 앓다만 감나무처럼 서있다
애써, 벗 같은 사람 하나 이 가을을 뒤척인다
때론 남기어진 상처들을 빗금처럼 바라본다
들국처럼 고요히 미소 짓다가 혹은 물빛으로 반짝이다가
엎어져 금모래빛 유년의 강가에서 노니는 꿈을 마신다
합수머리 모래언덕
고개 숙인 갈대 모가지에 옛 그림자가 머물다 가고
동부래기 울음이 한참을 허공을 맴돌다 간다

 

내 아비의 탯줄은 아직도 예서 머물고 있는가
먹빛 그림자 어두운 빈자리
납작 엎드린 농가에서 달려 나오는 홀아비 삼촌의 해수기침소리
그 밤, 다시 뜬소문처럼 찾아들 때
흰 가루약으로 하얗게 부서져 흐르는
여주 점동면 도리마을 청미천가에서
나는
아직껏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청미천(川) : 길이 37.56km, 유역면적 399.42㎢이다.

경기 용인시 원삼면()에서 발원하여 동류하여, 안성시 일죽면(), 이천시 장호원읍을 지나

경기·강원·충북 3도가 접하는 지점인 여주시 점동면() 장안리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상류에서부터 방초천()·죽산천()·석원천()·응천()·금곡천() 등의 작은 지류와 만난다.

경기 남부 지역의 관개수원으로서 큰 몫을 한다.

(그림 : 이황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