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상국

이상국 - 밤길

누렁이 황소 2019. 11. 12. 18:53

 

 

눈발이 날리는데

고한역에서 청량리행 기차를 탄다

밤차는 무덤처럼 적적하고

또 궁전처럼 화려하다

기차는 덜커덩거리며 강을 건너고

느닷없이 터널을 지나기도 하는데

막장 같은 어둠속에서

면사무소와 빨간 십자가와 작은 마을들이

모닥불처럼 환하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는 한다

길이란 게 그렇다

초행이긴 하지만 가다보면

언젠가 한 번 간 적이 있는 것 같은 건

나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서 그럴 게다

칸칸마다 흐릿한 불빛 아래

어디서 본듯한 사람들이

더러는 고개를 떨군 채 잠들었고

또 어떤 이들은 이야기로 밤을 팬다

언제 이 길을 다시 갈 수 있을까,

혹은 집 나온 지 꽤 여러 날 된 것처럼

쓸데없이 쓸쓸해져서 지나가는 어둠을 향하여

나는 칸델라 불빛 같은 생각들을 흔들며 간다

기차는 춥다고 가끔 비명을 지르지만

길은 멈추지 않는다

(그림 : 김지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