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이운진 - 헌책방에서

누렁이 황소 2019. 11. 12. 15:23

 

볕이 좋은 날

빈 가방을 들고 헌책방에 간다

 

한때는

누군가를 오싹하게 하거나

누군가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던 책들을

허락된 목격자처럼 살펴보다가

 

그가 다가온다...

2003. 사강 새롭게 느낀다

네가 선물한 책을 혼자 읽었다. 원

 

이 짧은 문장을 책 속에 남기고 떠나보낸 이들은 누구일까

궁금해한다

 

분명 등을 돌려야 할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낡은 책 속에서

흰빛을 잃도록 잠든 꽃잎

납작하게 눌린 파리를 보는 것보다

더 놀란 마음을 가만히 쓸어내린다

 

큰비 뒤에 읽을 인생과

자오선 아래 까만 밤을 지켜줄 그림들

 

너무 세게 껴안으면 안 되는 새끼고양이를 안듯

새로 산 헌책을 안고

 

가방 속 책들의 무게만큼

낙관주의자가 되어 보기로

아직은 사람을 사랑해보기로

햇볕 속에서 혼자 곰곰해진다

(그림 : 박주경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