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강봉덕 - 그 여자, 마네킹

누렁이 황소 2019. 10. 29. 17:46

 

때론, 패션도 종교가 된다

묵언수행하는 그 여자

침묵으로 한 종파를 완성시킨다

그 종파의 교리는 계절을 앞질러 가는 것

한 계절 똑같은 웃음이나 빛깔

표정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계절에 이르기 전

그 여자의 설법은 고요하고 은밀하다

이 거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술에 걸리듯

그 여자의 짝퉁이 되기 시작한다

포교는 항상 중심에서 변방으로 퍼진다

짧은 치마처럼 간단명료한 표정

미끈한 팔다리로 사람들을 전염시키며

파격적인 노출도 교리가 된다

패션이 변할 때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표정을 만들며 순종적으로 바뀐다

경기불황이 몰려오면

그녀는 더 화려하고 빠르게 변신한다

사라진 추종자를 다시 불러들인다는 것은

침침한 눈으로 바늘귀에 실 꿰듯 힘겨운 일이지만

손바닥 뒤집듯 가벼울 수 있다는 듯

투명한 벽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 여자, 화려한 변신을 시작한다

(그림 : 조새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