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이상인 - 푸른 사과를 기억함

누렁이 황소 2019. 10. 20. 17:35

 

 밑줄 그으며 몇 번씩 침 묻혀 넘겨본 생을 뒤적여 보면 한길 건너 모퉁이에 얼른

어른이 되고 싶은 내가 서성거리고 있었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대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다 자라지 못한 생각들을 이듬해

봄 탐스런 꽃으로 만들어 매달아보곤 하였네.

 

  하르르 그 꽃잎들 지고, 그대도 없이 주렁주렁 품에 안아 키운 다 자란 작은 애인

들이 너도나도 얼굴을 붉히는 동안 벌써 시린 발목을 동여매고 가는 야금야금 벌레

먹은 백 년 세월의 그림자.

 

  자꾸만 어른이 되지 못한 푸른 비애와 당신을 만나지 못한 노란 그리움들이 군데

데 차돌 박힌 땅바닥을 치며 뚝뚝 떨어져 나뒹굴고

 

  그렇게 흔들리는 세연(世緣)의 가지를 붙잡고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쭈글쭈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죽어라 손을 놓지 못하던 하, 수상한 세월이 있었네.

(그림 : 이상열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