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김나영 - 바닥론(論)

누렁이 황소 2019. 10. 8. 18:35

 

 

나는 바닥이 좋다.
바닥만 보면 자꾸 드러눕고 싶어진다.
바닥난 내 정신의 단면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하지만
바닥에 누워 책을 보고 있으면
나와 바닥이 점점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 같다.
언젠가 침대를 등에 업고 외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식구들은 내 게으름의 수위가 극에 달했다고 혀를 찼지만
지인은 내 몸에 죽음이 가까이 온 것 아니냐고 염려했지만
그 어느 날 내가 바닥에 잘 드러누운 덕분에 아이가 만들어졌고
내 몸을 납작하게 깔았을 때 집안에 평화가 오더라.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도
알고 보면 모두 바닥이 부실해서 생겨난 일이다.
세상의 저변을 조용히 받치고 가는
바닥의 힘을 온몸으로 전수받기 위하여
나는 매일 바닥에서 뒹군다.

(그림 : 안기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