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화은

이화은 - 중저가의 기쁨

누렁이 황소 2019. 9. 16. 22:07

 

터미널 지하상가에서 산

민소매 원피스가 나를 기쁘게 한다

중저가의,

비밀 연애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헌옷 속에 숨겨두었다가

어느 마음 깜깜한 날 깜짝 나를 놀래켜주리라

저 원피스와 나는

먼 내일을 약속하지 않아도 된다

딱 한 철 기쁘면 그만이다

느닷없는 소나기를 핑계 삼아

저급하게 슬쩍

옆구리에 달라붙어도 좋아

입 싼 여자처럼 펄렁

허벅지의 흰 살을 노출시켜도

눈 흘기며 나무라는 듯 봐 줄 것 같은,

이제 남자가 나를 설레게 할 수 없는

저음의 계절에

미래는 짧을수록 좋다고

막다른 골목에 선 절박한 연인처럼

함부로 구기거나 얼룩을 만들어

탕진하고 싶은, 조금은 싼티 나는

(그림 : 정종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