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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옥 - 사과의 생각

누렁이 황소 2019. 9. 7. 10:04

 

내가 사는 곳은 허공

허공은 부드러워

내 몸 어디에도 모서리는 없어요

하지만 나와 같은 얼굴이 너무 많아요

같은 혈족이지만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긴 싫었죠

나는 부분이 아닌 전부가 되고 싶어요

내 몸의 중심에 씨가 있어

멀리 날아갈 거예요

건들건들 바람의 걸음새에

과수원의 눈초리가 예민해지고

찰나에 몸을 조인 나사가 풀렸어요

그때, 자유!

라고 외쳤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낙과라고 불렀죠

 

날카로운 칼끝이 둥근 상처를 도려내요

내 피는 새콤달콤 향긋한데

이게 아닌데

붉은 드레스 차림으로 바구니에 나붓이 앉아

어느 화가의 이젤 속 정물이 되고 싶은데

외마디 비명이 냅킨에 쓱쓱 닦이고

칼날에 파인 살점은 갈색으로 변해가요

누군가 까만 씨를 뱉고 있어요

(그림 : 이상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