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정명순 - 허수아비

누렁이 황소 2019. 8. 27. 09:01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수룩하고 초점 없는 눈빛

만취한 아버지처럼 서있지만

그 속은 사람답고 싶은 바람으로 가득하다

 

강해 보이려는 과장된 표정과 몸짓

하지만 참새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뒤뚱거리는 허수의 실체를 안다

허수가 서있는 까닭이

참새를 쫓으려는 것이 아니란 걸

근질거리는 바람의 유혹

흔들리고 싶은 마음을

훠이훠이 쫓고 있다는 걸 안다

 

전부라고 믿었던 현실이

모두 떠난 텅 빈 들녘으로

바람이 들어차도

움직일 수 없는 허수 곁에는

참새, 이룰 수 없는 사랑

평생을 거부했지만

진정 기다린 건 참새였을까

기다림으로 빚어져

보내는 것이 운명인 허수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림 : 김동순 화백)